여기서 주사파란....
술에 절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치인과 술은 예전부터 아주 관계가 깊다는 말들이 있었다. 지금 현대의 정치인들도 그렇지만, 오래전 정치인들도 술과 떨어질수 없는 그 뭔가가 있었는갑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역사상 그런 술에 절인 채 정치를 한 리더들은 많았다.
1. 월리엄 1세(잉글랜드)
1066년, 노르망디 기욤은 부하를 이끌고 정치적으로 혼란 했던 잉글랜드를 정복(노르만정복). 노르만 왕조를 열었고, 잉글랜드 왕 월리엄 1세로 즉위.
그는 말년에 상당한 과체중이었으며,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그는 다이어트를 위해 "앞으로는 식사를 취하지 않고, 술만 마시겠다"라고 선언.
물론, 레드 와인은 지방 연소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고기와 함께 먹으면 시너지도 좋다고 생각되지만...글쎄, 얼마나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언대로 월리엄 1세는 식사를 끊고, 허기를 느낄 때 술을 마시는 생활을 계속했다. 식사 대신에 마시는 것은, 거의 알콜 중독이라는 뜻.
1087년에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고, 이로 인해 결국 사망하게 된다. 혹시 말을 타고 있었을 때 술에 취해 있었던 걸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2. 율리시스 S 그랜트(미국)
그랜트 장군은 유명한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의 영웅. 그는 또한 최초의 군인 출신의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인디언 정책에 실패, 부패와 스캔들 투성이로 "유능한 군인이 반드시 유능한 정치인은 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증명한 사례라고....
그랜트는 멕시코-미국 전쟁(1846~1848)에서 맹활약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너무 지루한 나머지 술로 시름을 달래게 되었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그것을 주위에 숨길려고도 하지않고 대부분 알코올 중독 상태로, 1854년에 상관 로버트 뷰캐넌이 분노하여 그랜트를 경질하고 말았다. 1861년에 남북 전쟁이 시작, 그랜트는 군에 복귀하지만, 그 술버릇은 군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고, 자리를 잡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제21 일리노이 보명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 된 후에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훈련을 제대로 소화해 상당히 유능한 군인이되었고,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달리게되었다는....
3. 케말 아타튀르크(터키)
오스만 제국 군인 시대에 거듭되는 전쟁에서의 대활약,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의 갈리폴리 상륙 작전을 저지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된다.
그 후, 앙카라 정보를 수립, 그리스 군의 침략을 막아 오랜 역사를 지녔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 터키 공화국을 건설했다.
아타튀르크는 대단한 애주가로, 라크라는 아니스의 향기가나는 주류를 매우 좋아했다. 국가의 최고 위치라는 격무를 소화하면서도 대낮부터 술을 마셨고, 사망하기 전에 매일 라크를 2병이나 비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8년 집무실에서 사망했는데, 사인은 간경변으로 분명히 술이 원인이었다.
간경변이라는 것은 생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의사는 술을 자제하라고 일렀지만 아타튀르크는 격노하며 "간경변은 술이 원인이 아니다"라고 진단서에 거짓말까지 작성하려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4. 바츨라프 하벨(체코 공화국)
체코는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세계에서 최고로, 그 기록은 23년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1989년, 체코 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린 "벨벳 혁명"의 중심이 된 문학자, 정치 운동가 바츨라프 하벨은 특히 맥주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공산주의를 비꼬는 풍자 작품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었고, 반체제의 리더적인 존재가 되어갔을 때, 당국은 하벨을 "무능하고 쓸모없는 단순한 음주"라고 논평했을 정도.
1968년에 동료와 함께 "77헌장"을 초안.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유명한 말을 내걸었는데, 이것도 회의에서 폭포처럼 맥주를 마시면서 토론을 하다 술에 취해 한 말이었다는 것.
하벨은 서방에서 자금을 원조받고, 동료 반체제 인사에게 지원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돈을 맥주로 바꿔" 원조하고 있었다는.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신생 체코 슬로바키아의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도, 프라하 성 정원에서 대규모 맥주 파티를 열었고, 또한 13년간의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 관계자를 모은 "비공식 이별 파티"에서는 사람이 과음하여 휘청 휘청 할 정도로 화려하게 술파티를 벌였었다는....
5. 칼라카우아왕(하와이 왕국)
하와이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미국과 자유 무역 협상을 하면서, 늘어나는 미국 이민 문제를 고심하고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려고 일본계 이민자의 이주를 권장, 사모아와 연합 "폴리네시아 제국"을 만들어 미국의 정치적 간섭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1887년에 샌퍼드 돌이 미국 이민자를 중심으로 왕정 폐지와 미국에 합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타협으로 칼라카우왕은 "미국 이민자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새로운 법률에 서명. 실질적으로 왕정은 무너지고, 미국의 정치적 압력이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칼라카우왕은 격무 속에서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1890년에 알콜 중독에 빠지게되었다. 이듬해 신장의 염증이 원인으로 사망하게 된다.
6. 셀림 2세(오스만 터키)
오스만 제국 제11대 술탄 셀림 2세는 "술 취한 셀림(Sarhos Selim)"이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술꾼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아버지 쉴레이만 1세는, 거듭되는 군사 원정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던 영웅.
그런 위대한 아버지를 둔 셀림은 아버지와는 달리 군사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궁전에 틀어박혀 방탕한 생활을 좋아했다. 정치는 재상과 관료들에게 맡긴 채 거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고.
"키프로스가 좋은 와인 산지이다"라고 알았던 셀림은, 재상 소코루의 반대를 무릅쓰고 키프로스 원정을 감행. 1570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둔군의 저항을 물리쳐 1년 후 점령했다.
중요한 항구를 잃은 베네치아는 즉시 기독교 국가와 함께 반 오스만 군대를 일으켜, 동년 역사적인 레판토 해전이 발발. 이에 패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의 패자"의 체면이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와인 산지를 얻기위해 큰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