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20세기 초에 활약한 스트롱맨


 


현재는 보디빌딩이 스포츠의 일종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고, 일반인 중에도 프로만큼은 아니지만 매일 몸을 단련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19세기 시대에도 마초한 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마초만으로 슈퍼스타가 된 남자도 많이 있었다.

여기...19세기 유럽의 스트롱맨을 찾아보자.

 


1. 존 홀탐(덴마크) 1815~1919

존 홀탐은 "대포로 지근 거리에서 쏜 포환을 몸으로 막아낸다"라는 퍼포먼스로 인기를 모은 스트롱맨이다.

어린 시절에 선원이 되어, 그곳에서 일하면서 마초의 몸을 단련한 홀탐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그 강인한 육체를 사용한 역기를 보여줌으로써 "프로의 스트롱맨"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870년에 유럽으로 돌아온 홀탐은 새로운 챌린지로 "근거리에서 포환을 잡는다"라는 생각을 해낸다. 그는 첫 도전에 실패하고, 세 손가락을 잃게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목숨을 건 연습을 계속, 2년 후에 마침내 이 기술을 마스터했다.

무대에 선 홀탐의 어시스턴트가 50파운드(약 22kg)의 포탄을 대포에 장전, 홀탐은 장갑과 가슴에 패드를 붙인 것만으로, 그 반대편에 섰다. 대포가 발사되었고, 홀탐은 뛰어난 반사신경과 힘으로 포환을 받아낸다. 포환은 매우 뜨겁기 때문에 받았다가, 바로 아래로 떨어뜨려야....

이 퍼포먼스는 관객들을 완전히 놀라움에 빠뜨려버렸다. 너무 상식에 어긋난 퍼포먼스였기 때문에, 포탄이 가볍다라든지, 화약의 양이 적었다라는 의혹이 나왔지만, 홀탐은 "나하고 똑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3000 프랑을 주겠다"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2. 루이 씰(캐나다) 1863~1912

루이 씰은 캐나다 퀘벡주에서 태어난 스트롱맨으로, 19세기 말 웨이트 리프팅 챔피언으로 유명. 당시 "세계 최강의 남자"라고 물으면 모든 사람들이 루이 씰이라고 했을 정도.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난 씰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거대했는데 출생시의 체중이 8kg에 가까웠고, 17세 때에는 약 177cm, 체중은 약 104kg였다. 18세 때 씰은, 처음으로 "누가 말을 손으로 들어올릴 수 있을까"라는 스트롱맨에 출전했고, 그는 말을 쉽게 들어 올려 우승을 차지.

그후 씰은 계절 노동이나 경찰의 일 등을 하면서, 스트롱맨 쇼에 매년 출전해 그때마다 우승하여 명성을 높여갔다. 그가 성취한 전설적인 기록은 많이 남아있다.

247kg의 무게를 새끼 손가락을 땅으로부터 몇 센티미터 들어 올린다....중량급의 말 2마리를 좌우 한쪽씩 팔에 묶어 당겼지만....견뎌냈고, 등에 받침대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 16명이 올라탔다는....총중량은 1,645kg...덜덜.

씰이 들어 올린 것으로 유명한 약 127kg의 "씰 덤벨"은 지금도 스트롱맨 쇼에서 이용되고 있다.

 


3. 오이겐 샌도우(독일) 1867~1925

프로이센에서 태어난 오이겐 샌도우는, 여흥 흥행의 스트롱맨으로 경력을 시작. 샌도우는 바벨 등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 작품과 같은 아름다운 "근육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했다.

이 아름다운 근육을 선보이는 무대는 그의 쇼의 주목이 되었고, 샌도우는 유럽 전역에서 공연을 했고, 1901년에는 사상 최초의 보디빌딩 콘테스트를 개최. 그는 그것을 "그레이트 대회"라고 불렀고,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개최되었다.

 


그의 근육에 반한 사람은 많았고, 대영박물관의 학예원 레이 랭케스터는 완벽한 남성상의 견본으로서, 샌도우의 긴장된 체격을 주조해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을 생각해 냈다. 샌도우의 전신을 석고로 형을 잡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동상은 몹시 평판이 나빴고, 품질도 좋지 않아, 일개의 엔터테이너의 몸에 왜 예술품이냐?라고 하는 비판이 잇따랐다. 결국 3개월밖에 전시되지 않았고, 창고행....1990년이 디어 샌도우를 신봉하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이 동상의 구입을 제안했고, 캘리포니아로 건너가게 되었다.

 


4. 아서 삭슨(독일) 1878~1921

아서 색슨은 "삭슨 트리오"라는 그룹에서 서커스로 활약한 스트롱맨이다. 기록에서는 그다지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오늘의 트레이닝 방법에 영향을 준 한 사람이다.

삭슨은 작센 왕국의 라이프치히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근육 트레이닝에 빠져 운동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두 남동생 쿠르트와 헬만과 함께 집 뒤뜰에서 파워 콘테스트를 열고, 이웃 젊은이들과 대결하곤 했다고...

이윽고 그들은 "삭슨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하면서 퍼포먼스를 하게되었다. 3명이 발을 올리고 그 위를 6명이 탄 차를 진행, 아서가 한팔로 바벨을 들어 올려 거기에 형제가 매달린다, 아서가 벤치 프레스를 하고 그 위에 형제가 타는 등의 퍼포먼스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아서와 오이겐 샌도우의 벤치 프레스 대결도 전설로 남아있다.

 


5. 토마스 인치(영국) 1881~1963

토마스 인치는 "영국 최강의 남자"라고 불리는 보디 빌더로, 현재도 보디 빌더의 동경인 "인치 덤벨"을 발명하여 스스로 들어 올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린시절부터 근육 트레이닝을 좋아했고, 오이겐 샌도우에 동경해 트레이닝에 힘썼고, 19세로 이미 당시의 스트롱맨 잡지의 하나로부터 "세계 최강의 청년"이라고 칭찬받고 있었다. 현지 스트롱맨 챔피언십에서 승리를 거듭, 인치는 1910년에 "영국 최강의 남자"의 칭호를 얻었다.

1903년, 그는 통신 판매의 근육 강좌를 시작, 인기를 얻었고, 2년 후, 저작 "Schentific Weight-Lifting"을 출판. 대성공을 거두어 4만부 이상 팔렸다. 1930년대에는 근육 트레이닝의 일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인치는 오버헤드 리프트를 자랑했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리프트는 "인치 덤벨"이다.

인치 덤벨은 무게가 172파운드 9온스(약 78kg)로, 손잡이의 직경은 2.3인치(약 15cm)이고, 들어 올리는 것은 어려운 기술이다. 1908년 6월 6일, 인치는 처음으로 이 덤벨을 가볍게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6. 알렉산드르 자스(루마니아) 1888~1962

알렉산드르 자스는, 현재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당시 폴란드 령)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순회한 서커스의 스트롱맨이다.

자스는 어린시절에 서커스에 등장하는 스트롱맨의 기술에 열광했고, 자신도 몸을 단련하는 것에 열정적이었다. 이웃 숲에 들어가서 가지를 구부리거나 나무에 올라가거나 돌에 구멍을 뚫어 만든 덤벨과 바벨 등으로 근육을 단련했다.

제1차 세계 대전중, 러시아군에 소속되어 있던 그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 수용소에서 4번이나 탈주에 도전. 그는 포로가 되어 있을 때도, 철봉이나 사슬을 당기는 아이소메트릭 운동으로 근력을 단련하고, 팔력으로 수갑을 부수고 창의 철 격자를 구부려 감옥에서 탈주.

아이소매트릭 운동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에 힘을 가해 저항하는 운동이다. 아이소메트릭의 좋은 점은,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다른 운동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특정 각도나 위치에서의 트레이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스는 고가의 트레이닝 장비나 단백질 등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가까이 손에 닿는 것을 사용해, 합리적인 독자 이론을 조합해 시간을 들여 마초인 근육을 몸에 익힌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