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핵전쟁에서 구한 인물 바실리 아르키포프

영웅이라고 하면, 스파이더 맨과 같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전세계 악당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그런 인물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1962년에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 해군 B-59 잠수함 부함장 바실리 아르키포프는, 미국에 핵 공격 버튼을 누르는 것을 거부하며, 세계 핵 전쟁의 위기로부터 아슬 아슬하게 막았던 인물.


그의 이름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런 사람 이야말로 세계의 영웅 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1. 쿠바 미사일 위기 "시련의 13일"



1961년, CIA에서 훈련을 받은 망명 쿠바 인 부대가 쿠바 피그만에 침공. 카스트로 정권의 타도를 도모했다. 쿠바인 부대 1,500은, 즉시 쿠바 정부 보안군에 의해 구축되어 버려, 미국의 음모는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 이후, 동쪽 진영, 특히 소련과 직접적인 대상이 된 쿠바는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되고, 미국도 태도를 바꾸게되었다.


그러던 중, 1962년 5월에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와 쿠바의 카스트로 대통령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비밀 계약을 체결했다. 이것은 미국과의 핵 전력 조건을 고르고 싶은 소련과 더 이상 미국의 개입을 방지하려는 쿠바의 의사가 합치되어 합의되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핵 전력 조건은 미국측이 유리했고, 미국은 동맹국 이탈리아와 터키에 핵 미사일을 설치하고 언제든지 16분 이내에 모스크바에 직격할 수 있는 준비가되어 있었다. 한편, 소련은 런던과 파리에 언제든지 파괴 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미국 본토에 닿을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보유하고 있지 않아, "상호 안전 보장으로의 핵 전력의 평준화"가 초미의 과제였다.


1962년 가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미국은 U-2기를 보내 쿠바를 비행,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려 했다.


1962년 10월 14일, 귀환 한 U-2기는 미사일 기지 사진을 입수.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확인. 다음 날 사진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내져 지금까지 핵에 직접 표적이 된 적이 없었던 미국에서는 단번에 긴장 상태로 되어버렸다.


그것이 세계의 역사에 유명했었던 쿠바 위기의 시작이다.


바실리 아르키포프는, 소련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B-59의 부함장으로 긴장이 고조된 쿠바 근해에 침투해 유사시 미국에 핵 공격을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2. 잠수함 승선과 그의 경력


바실리 아르키포프는 1926년 1월 30일, 모스크바 근교 마을 Staraya Kupavna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었던 소년 아르키포프는, 16살 때 태평양 고등 해군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47년에 카스피해 해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흑해 북부 발트 함대에서 잠수함에 근무.


1961년 그는 첫 번째의 "핵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핵 잠수함 K-19의 부함장이었던 아르키포프는, 1961년 여름에 그린랜드 부근에서 실시 된 연습에 참가했다. 그런데 7월 4일, 잠수함의 복사 냉각 시스템에 누설이 발견되었고, 백업의 냉각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원자로 용해 위험이 높아지고 있었다.


원자력 잠수함의 임계 사고라고 말하는, 역사상 보기 드문 대형 재해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아르키포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승무원을 보내, 그 자리에서 냉각 시스템을 구축. 아르키포프는 자신이 가진 최대의 전문 기술을 활용하여 현장에서 지시, "대참사를 절대적으로 방지"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작업, 대형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높은 방사선 량으로, 실제 작업에 투입 된 승무원은 사망. 따라서 K-19에서는 공황상태가 되었고, 아르키포프를 비롯한 지휘관들의 생명이 표적이된 만큼 긴박한 분위기가 되었다.


사건후 아르키포프는 정부로부터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했고 충성했다"며 메달을 수여, 이후 원자력 잠수함 B-59의 부함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3. 아르키포프, 핵 어뢰 발사를 거부


1962년 10월 1일, 미소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4척의 잠수함이 쿠바를 향한다.


아르키포프가 부함장을 맡고있는 B-59도 그 중 한 척. B-59는 히로시마 급의 핵무기를 포함한 22개의 발사대를 갖춘 공격형 잠수함이다. 정치 장교가 탑승하고 있는 군함은, 현장의 함장 클래스의 판단으로 핵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시는 대 잠수함 전파로 전송되어 있었지만, 심해에 잠수하는 경우 닿지 않기 때문에, 현장에서 임기웅변으로 대응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가 취해졌다라고 생각된다.


10월 24일, 미국은 소련에 대해 "쿠바 근해 해상을 봉쇄하고, 근처에 숨어있는 잠수함을 강제 부각시키기 위해 연습용 폭뢰를 투하하겠다"고 통보했다.


예정대로 10월 27일부터 미군은 폭뢰 투하를 시작, B-59는 폭뢰를 피해 깊은 심도로 이동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대 잠수함 전파를 수신 할 수 없게되었다.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 이미 개전하고 있는지 여부도 모르고, 4주 가량 임무로 피곤해있던 B-59 승무원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B-59의 함장 발렌틴 사비츠스키는...


"아마도 소련과 미국의 핵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미국에 핵 공격을 해야한다"라고 주장.


B-59의 핵 어뢰 발사는, 함장과 부함장, 정치 장교...이렇게 3명의 찬성이 필요하다는 합의제로 되어있어 정말 핵 공격을 할 것인지 여부는 대화로 할 수 있었다.


일반 군함에서는 함장과 정치 지도원 만의 찬성으로 발사 가능했지만, 아르키포프는 부함장이었지만, 다른 소형 잠수함 대 사령관이기도 한 계급은 함장과 동일했기 때문에, 그의 찬성도 필요했던 것이었다.



함장 사비츠스키와 정치 장교는 핵 공격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아르키포프는 공격을 거부했다. 그 주장은.


"모스크바의 지시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충동적인 행동은 할 수 없다. 우선 모스크바와 연락이 최우선으로 필요하다"....라는 것이었다.


말다툼은 계속되었지만, 결국 아르키포프는 함장 사비츠스키를 설득, 쿠바 근해의 해상에 부상했다. 그곳은 미국 함대의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무선으로 "러시아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르키포프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만약 아르키포프가 없었고, 함장과 정치 지도원의 판단으로 핵 공격이 이루어졌다면....생각만해도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 핵 전쟁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에는 비밀로 되었다가 2002년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당시 생존했었던 아르키포프의 아내 올가는 두 차례나 핵 위기에서 세계를 구한 죽은 남편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핵전쟁을 막은 영웅은 러시아의 잠수함 승무원. 그 남자의 이름은 바실리 아르키포프. 난 항상 남편의 모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