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 관저 지하 벙커는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두께 4m의 콘크리트에 의해 건축되어져 있고, 깊이는 15미터에 달했다. 원래는 공습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였지만,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지상의 관저로 바꾸어 사령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해체되기 직전의 총통 관저>
1947년의 모습이다.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지만, 이때는 이미 너덜 너덜해진 상태.
<관저의 정원에 만들어진 벙커의 모습>
왼쪽이 총통 벙커, 오른쪽은 이전의 벙커....오른쪽의 큰 사각형은 처음(1935~36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왼쪽의 정방형에 가까운 것이 새로 만들어진 것.
지하 벙커는 대본영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국방군 최고 사령부와 육군 총사령부, 공군 총사령부 등 독일군 중추에 관련된 인물이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베를린 시가전 말기 인 1945년 4월 30일에 여기에서 자살했다(추정). 다음날에는 후계 총리의 괴벨스도 자결, 5월 2일에는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히틀러와 그 애인 인 에바 브라운은 관저에서 가구를 들여와 6개의 방을 사용, 함께 살고 있었다.
1936년 당시, 이곳에 있던 총통 관저 아래 첫 번째 벙커(천장 두께 1.6m, 벽 두께 1.2m)를 건설하고, 히틀러가 처음 이 대피소에 피난 한 것은 1940년 8월의 영국군의 공습 때.
1944년 10월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버틸 수 있었던 두꺼운 콘크리트로 강화 된 벙커가 완성.
4월 20일, 지하 벙커에는, 나치의 고위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 해군 총사령관 카를 되니츠 등도 모여, 히틀러의 56세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했었다.
<지하 벙커의 구조>
벙커는 매우 좁은 방이 구획별로 나뉘어져 있었고, 히틀러는 2층의 가장 안쪽 방을 이용했었다.
12. 괴벨스의 집무실과 의사의 방
13. 회의실
14. 회의실과 지도실
15. 전화 교환실, 보루만의 집무실, 경비병의 방
16. 발전기 환기용 식물
17. 히틀러의 집무실
18. 욕실, 화장실
19. 에바 브라운의 거실
<현재 지하 벙커 터>
벙커 터가 특정 된 것으로, 감출 수 없게 된 베를린 정부는 거기에 설명 간판을 부착. 현재는 주차장.
<전쟁중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있던 히틀러>
유럽 전역에 위치하고 있던 총통 대본영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1935년에 재건, 확장, 명칭 변경.
<소련군, 베를린 점령>
1945년 4월의 베를린 시가전 후, 파괴된 의사당 라이히 스타크의 지붕에 적기를 내거는 소련군
대전 말기, 독일에 침입 한 소련군이 점령 지역에서,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많은 독일인 여성을 강간, 윤간 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어떤 러시아 장교는 일주일 만에 250명의 소련군에게 폭행당한 소녀를 만나 아연실색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소련군의 만행은....일본의 원폭투하를 앞당기게 했다는 설도 있다. 왜냐하면, 일본 패망 직전에 소련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코 앞에 있었기 때문.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일본 본토를 상륙하면 소련군에 의해 50만 가까이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고, 원폭을 투하하면 24만 6천명정도를 예상. 그래서 끔찍한 일이기는 하지만, 올바른 정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