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선전부 간부 한스 프리체는, "괴벨스는 대단한 보어만을 두려워했다"라고 증언, 국가 재무상 폰 쿠로직은 "보어만은 히틀러의 "악마"이며, "갈색 추기경"이었다"라고 주장.
구데리안은 "히틀러의 측근중에서 히믈러의 다음으로 나쁜것이 보어만이었다", 사형 판결을 받은 한스 프랑크는 "극악무도 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보어만이 죽었는지 여부를 괴링에게 물으니, "그 녀석은 지옥의 기름에 튀겨지고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라고...
이처럼 히틀러의 주변 사람들도 싫어했고, 두려워했던 마르틴 보어만...패망 직전에 자살한 괴링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형 집행에서 벗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1900년 생인, 마르틴 보어만은, 1918년에 포병 연대에 배속되지만, 실제 전투도 한번 해보지 않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그 후에는 농장 관리인으로 있었다.
그 후, 독일 의용군에 들어가 회계를 맡고 있었는데, 돈을 빌려주고 돌려주지 않았던 초등학교 교사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 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간의 징역형을 선고. 주동자로 해서 가장 무거운 형량을 받은 것은 루돌프 헤스....
그 후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으로...
신장은 170cm도 되지 않았는데, 땅땅한 체격에 목이 굵은 "황소"라는 별명이었던 보어만은 1927년에 나치당에 입당. 고참 당원은 아니었지만, 당 원조 기금 부장이 되었고, 히틀러의 집권 후에는 총통 대리 루돌프 헤스의 비서로 임명된다.
이러한 출세 가도를 달린 이유는, 당의 규율을 담당하고 있던 유력자, 빌터 브후의 딸로 9살 연상의 게르다와의 결혼이 가장 컸었다고 한다. 결혼식에는 히틀러도 참석했다고 하니....
1937년에는 SS 소장으로 임명된 것 같은데, 베를린 총통 벙커에서 탈출 할 때, SS 장교 유니폼을 입고 있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준다고. 어찌되었든지, 히믈러와 괴링 등처럼, 훈장과 명예 칭호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의 야망은 오로지 총통에게 자신이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는 것 뿐이었다는..
보어만의 상사 인 헤스는, 총통에게 개처럼 충성했지만, 점점 갈수록 무디어져 갔고, 비행기 조종에 열중하고, 스포츠 카를 타고 돌아다니며 가족과 여행이나하고 다녔다는...
이에 보어만은 히틀러에게 더욱 근접하여 최측근으로 행동을 시작. 히틀러가 즐겨찾는, 베르히테스가 덴의 산장 주변의 땅을 부지런히 사모았고, "그 낡은 농가가 경관을 해치고 있다"라고 히틀러가 중얼거리기만 하면, 그 다음날 바로 총통의 시야를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농가를 철거.
예술과 책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전혀 인연이 없었던 보어만은, 히틀러의 독서 경향을 노려, 건축, 니체, 철학, 그리고 로마역사, 북유럽 신화, 전쟁사 등의 신간 서적의 내용을 부하에게 분담해서, 하나의 보고서에 정리하도록 지시하고 이것을 머리속에 집어 넣으려 노력. 어떤 자리에서는 히틀러를 깜짝 놀래키기도 했다고 한다.
나치 당 관방장관으로서, 또한 총통 비서 겸 개인 부관으로 히틀러에게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히틀러와의 면담도 보어만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은 보어만을 통해....와 같은 상황에 대해, 고참의 중진 인 괴벨스와 히믈러도 불안해 했다.
최후의 때가 임박했을 때의 총통 지하 벙커. 보어만 방에는 출입구가 3개있었고, 하나는 회의실을 통하고, 하나는 괴벨스의 방으로, 그리고 또 하나는 전화 교환대로 가는 방...
이 벙커에 오는 모든 정보는 보어만이 체크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이렇게 하여 괴링과 히믈러가 배신자의 길로 돌진해 버렸던걸까?
최후의 날...보어만은 괴벨스처럼 자살하지 않았고, SS중장 유니폼을 껴입고, 그의 비서에게 "나는 탈출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탈출 도중에 죽었다는 사람, 소련의 스파이가 되어 러시아측에 남아있다고 하는 사람, 또는 남미에서 살고 있다는 등...보어만의 생존설은 끊이지 않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