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싶지않은 중세 시대의 실태

화려한 이미지가 있는 중세 유럽, 실제의 생활 모습은 지금의 우리로서 보면, 매우 전대미문의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들의 생활을 살짝 엿보면...


썩 알고싶지 않은 그들의 생활 모습이다.




- 화장실은 변기로, 그 배설물은 길거리에 투척


유명한 이야기지만, 중세 유럽에는 하수가없어, 용변은 변기에 차곡 차곡 모았다. 그러다가 변기가 가득 차면, 배설물은 강이나 정원이나 길거리에 그냥 버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심한 악취로 진동.



12~13세기의 파리에서는, 도로의 중간에 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변기"의 배섦루을 흘려보냈다. 이 수로는 세느 강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물은 물 흐름과 함께 강으로 운반되어 간다. 영국의 캠브리지에서는, 오물은 쓰레기와 함께 버려지고 있었으며, 3주 마다 시의 직원이 정리.


그러나 이러한 룰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던것 같고, 많은 일반 시민은 "가루디 루(Gardy loo!)"라고 외치며 길거리에 직접 투척했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화장실이라고 해서 따로 방이없었고, 루이 14세 시대에는 274개의 의자식 변기가 있었다. 그러나 궁전에는 상시 4000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으므로, 274개는 너무 적었다. 그래서 근처에 변기가 없을 때, 신하들은 복도와 방 구석, 정원의 나무에서 볼일을 봤다. 귀부인들의 우산처럼 펼쳐진 스커트는 이를 위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결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라믹 휴대용 변기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내용물은 정원에 그냥 버렸고, 궁전의 변기의 배설물도 정원에 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배르사유 궁전은 안뜰 또는 통로, 복도 등 분뇨로 가득하여 엄청난 악취였다고 한다.


- 욕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생활상을 보면, 상당히 목욕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있지만, 중세 유럽인에게 목욕은 그다지 필요없었던 것 같다. 특히 16세기 쯤은 물을 유독 싫어했었다는.


16세기경 프랑스 국민은 물 공포증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피부 표면은 투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물은 모공을 열고 유해한 외기의 공격에 몸을 맡긴다고 생각했었다.


위생에 관한 서적에서는, 먼지나 체취를 닦을 때는, 향기를 붙인 리넨 또는 허브와 장미 꽃잎을 모아 놓은 것으로 몸을 닦는 것이 좋다라고 권장하고 있다.





1801년이 되어서도, 어느 의사의 관찰에 따르면, "런던에 사는 대부분의 남성, 그리고 많은 여자는 손과 얼굴은 매일 씻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몸둥아리는 수년 동안 씻지않고 있다"라고...


- 대단한 헤어스타일



중세에서도 패션 손님의 변동은 있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 시절의 베르사유에서 특히 심한 헤어 스타일로 모두 경쟁하고 있었다.


귀부인의 머리에는, 그 때 관심있는 모든 것들이 담겨있었다. 거기에는 화단이 있고,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양과 양치기 소년 소녀가 있거나, 팔레=로얄공원이거나, 가로수이거나 카페이거나...



머리를 아름답게 가꾸는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머리가루를 뿌리는 것. 뿌린 소재는 밀가루(?)였기 때문에, 물론 벌레가 득실 득실 들끓었다는....이것을 비꼬아서, 머리에 살고 있는 벌레와 이를 "우아한 귀부인이 자신의 비용으로 기르고 있는 친위대"라고 명명하기까지 했다는...


- 공개 처형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다양한 고문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 중세 유럽은 물론 공개 처형은 최고의 오락의 하나였다. 당일은 구경꾼으로 분위기는 물론 처형 후 죄인의 살점이나 머리카락을 가져가 부적으로 하는 습관도 있었다고.



프랑스에서는 1939년까지 단두대 처형이 공개됐다. 공개 처형은 항상 환락의 마지막으로, 처형은 주변 건물들까지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724년 잭 셰퍼드의 처형은 당시 런던시의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만명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타이반 형장은 1783년에 폐쇄되었지만, 뉴 게이트 감옥으로 장소를 옮겨 공개 처형은 계속되어 1807년에는 운집 한 관람객 100명 이상이 압사하는 사고도 일어났었다.


-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온몸을 칭칭 감아



아기는 태어나자 마자 기형으로 성장하지 않도록 제대로 두 다리로 설 수 있도록 붕대로 칭칭 몸을 감는다는 것. 그래서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신생아의 절반은 1년을 맞이하기 전에 사망했다고.




- 공포스러운 의료 행위


신체의 일부를 손상하여 대량으로 출혈 시키는 사혈, 몸속에 수은을 바르는 수은 치료, 외과 의사는 이발사가 겸임.... 등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오싹한 의료 행위가 있었다.



물론 의학적 근거도 없는 치료도 많았었고, 마지막은 결국 기도하는 것이 최후의 치료였다는 것.


수도사가 외과계 치료를 할 수 없게 함으로써, 세속적 수술(surgeon)의 직업이 생겼고, 의료를 행하는 수도사 등의 지시를 받아 외과적인 치료를 실시했지만, 곧 독자적으로 종사하게 되었다. 당시 수술 작업은 사고나 전투에 의한 상처에 대해, 절단 절제하는 것으로 지혈을 하는 정도였으며, 칼을 다루는 사람으로소 이발사가 수술을 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