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성 이유가 엉망진창이었던 십자군 원정

정의의 조각 하나없었던 무지막지 한 십자군 선언.


십자군이라고 하면, 1096년 제1회부터 1272년 제9회까지 아나톨리아에서 이집트의 중동 지역에 십자군 국가 지원을 위해 기독교 군대가 전개 한 일련의 싸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십자군으로는 "교황이 이교도와 이단의 배제를 호소하여 결성 된 군대"였지만, 중동 지역 이외에 파견 된 십자군도 많이 있었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발트 지역에 파견 된 "북방 십자군"이나 프랑스 남부의 이단 알비주아파를 토벌하기 위한 "알비주아 십자군"이 유명하다.


잘못된 가르침을 박멸함으로써, 세계를 더 좋게 만들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명분이었고, 실제로 십자군 관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분명 동기가 불순한 것이나 이상한 것도 많았다.


1. 스티다즈 십자군(독일)


브레멘 대주교의 제멋대로 생각으로 일어난 십자군. "스티다즈"는 13세기 전반에 북 독일에 있었던 자유 농민의 호칭이다.


권위와 위정자에 묶이지 않고, 자유를 모토로 사는 무리로, 브레멘 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세금 지불을 거부하였다. 성난 대주교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로 완력이 강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대주교 군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권위를 부정하는 세력에게 당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대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게 "저 발칙한 농민들에게 십자군을 파견 해 달라"고 호소. 실제로 그들은 이단도 무엇도 아닌 단순히 대주교에 납세를 거부했을 뿐이었지만, 그레고리우스 9세는 스티다즈를 이단으로 인정하여 1232년에 십자군을 파견.


스티다즈는 십자군의 공격에 맞섰지만, 1234년 농민군은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2. 콜론나 가문으로의 십자군(이탈리아)


로마의 유력 집안끼리의 다툼이 십자군으로 발전.


13세기 후반 로마의 유력 문벌에는 오시니 가, 카에타니 가, 콜론나 가문의 세 가문이 있었다.


1294년 오시니들과 카에타니들은 결탁하여 카에타니 가의 베네딕트 카에타니를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8세로 선출하여 라이벌 이었던 콜론나 가문을 앞지르는데 성공.


콜론나 가문은 전 교황 첼레스티노 5세의 퇴위가 불법이라고 비난, 결국 교황의 보물을 빼앗아 버린다. 이에 대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자코모 콜론나와 피에트로 콜론나의 신병을 확보, 1297년에 콜론나 가문이 빼앗은 교황의 보물을 주지 않으면, 석방시키지 않겠다고 위협. 어쩔 수 없이 콜론나 가문을 보물을 반환하지만, 여전히 교황을 "잘못된 교황"이라고 비난을 계속했다.


참을 수 없게 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결국 콜론나 가문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선언했다. 콜론나 가문은 로마에서 추방되어 프랑스로 도망가게 되었다는.. 


단순한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아니었고, 유력한 문벌끼리의 다툼이 배경에 있었다.


3. 안봐이라의 마크 워드로의 십자군(이탈리아)


황제의 충신에게 격분한 교황의 십자군.


안봐이라 마크 워드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를 섬기는 사람으로, 황제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종군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사후 아들 헨리 6세를 섬겼고, 이탈리아 반도의 마르크의 통치를 위탁하는 등 황제의 오른팔로 활약했다.


헨리 6세의 사망 후,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에 올라, 아직 어린 왕의 후견인으로 교황 인 노첸시오 3세가 자청했다. 황제의 후견인이 되는 것으로, 교황의 지위가 황제보다 높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지만, 마크 워드는 이에 반발. "황제는 스스로의 의지로 나를 프리드리히의 섭정으로 임명했다"라고 주장, 군사를 일으켜 시칠리아 전역을 제압해 버렸다.


교황 인 노첸시오 3세는 분노하여, 제후에 "마크 워드에 대한 십자군" 결성을 호소.




마크 워드는 제3차 십자군에 참가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존경받았었고, 교황 인 노첸시오 3세의 제멋대로 하는 행동으로 인식되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십자군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마크 워드가 죽었기 때문에 십자군 원정은 그냥 흐지부지 되었다는...


4. 아라곤 십자군(스페인)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 교황이 선언 한 십자군.


교황 마루티누스 4세는, 시칠리아 왕 샤를 당주(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아들)의 권위에 의해 교황에 올랐었고, 프랑스 앙주의 꼭두각시였다.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에 의해 샤를 당주가 시칠리아에서 쫓겨나고, 그 틈을 타 아라곤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을 때, 마루티누스 4세는 페드로 3세에 대해 "프랑스 아라곤 왕위를 전달" 할 것을 요구.


페드로 3세가 이를 거부하자 마루티누스 4세는 아라곤에 대한 십자군을 선언했다.


프랑스 왕 필립 3세가 이끄는 군은, 육지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라곤에 침입, 바다로부터도 대량의 보급선으로 아라곤에 상륙을 한다는 계획도, 육지에서는 이질이 유행하여 싸우기는 커녕 지리멸렬해버렸고, 바다에서도 해군이 떡실신되어, 혼란속의 프랑스군은 아라곤 군으로부터 떡이되었다는.


5. 알렉산드리아 십자군(이집트)


키프로스 왕의 이집트 정복의 야망.


키프로스는 제3차 십자군 리처드 1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된 후, 예루살렘 왕을 쫓아내고 기드 루지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제10대 국왕 피터 드 루지냐는 야심찬 사람으로, 이집트에 대해 십자군을 일으켜야 된다고, 유럽 각국 궁정에서 설교하여 1365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지원을 업고, 이집트 무역항 인 알렉산드리아에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의 목표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고, "이집트를 정복하는 것"이 목적으로 되어있었지만, 동맹이었던 베네치아와 제노버는 당시의 2대 해운 국가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었나 추측.


당시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지중해 일대 무역 센터였으며, 여기를 파괴하여 키프로스 지중해의 무역 센터로 할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키프로스의 십자군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철저하게 약탈하고 있었지만, 카이로에서 토벌군이 몰려온다고 하자 곧 철수해버렸다.


또한,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그후 이집트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다시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장사를 계속하게 되었다는...마음이 손바닥 뒤집듯이~


6. 발도파 십자군(프랑스)


교황에 의한 이단 대학살.

발도파는 12세기에 프랑스 남부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일파로, 알비주아 파와 쌍벽을 이루는 이단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알비주아 파는 사는 것 자체를 악으로 간주했지만, 발도파는 이 세상은 허무 한 부를 요구하는 것등은 무의미한 일이며, 철저하게 "청빈, 검소"를 모토로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 한 종파이다.


현대의 가치관으로서 생각해보면 뭐가 잘못외었지?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는 교황권이 절대의 시대. 로마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떨어져 독자적으로 해석 한 가치관을 전파하는 것 자체가 큰 범죄였던 것이다.


1487년 교황 인 노첸시오 2세는 프랑스 남동부 황태자비를 거점으로 하는 발도파에 십자군은 선언.


발도파 신자는 알프스 산맥의 기슭에 동물을 파고, 십자군의 습격에 대비했지만 속수무책 없이 학상당하고 말았다.


특히 공격적인 것도 아닌 집단을 교황의 담론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학살 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교황의 대 범죄라는 사실.